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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네 권의 책에 관한 이야기 지난 주에 가까이 사는 친구를 만나 대대적으로 책을 서로 빌려주고 빌리는 작업(시립도서관에 가는 것조차 귀찮아질 때 종종 이렇게 하는데 이게 은근히 재미있다)을 해서, 당분간은 읽을 책이 많아 행복했다. 그렇게 해서 얼마 전까지 고스트 라이터와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었는데, 빌린 책들 전부가 그리 심각하게 읽을 필요가 없는 소설들이고 워낙 책을 빨리 읽는 축에 속하다 보니 벌써 밑천이 보인다. 국내판은 마땅한 이미지가 없어 해외판 이미지를 쓴다. 국내에서 '어느 샐러리맨의 유혹'이란 야릇한 제목으로 탈바꿈한 헨리 슬레서의 '회색 플란넬 수의'(The Grey Flannel Shroud). 분량도 적고 책의 판형도 작아서(;;) 금방 다 읽었으니 이제 리뷰만 남았다. 스릴러 장르이며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 더보기
80일간의 세계일주(열림원 판) by 쥘 베른 1.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얼마?"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 450Km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생생하게 느껴지질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거의)오차가 없는, 명확한 단위에 의한 표현조차 감이 잡히질 않는다. 천릿길이라고 하면 좀 나으려나. 그보단 비행기로 40분 내외, KTX로 3시간, 승용차로 (휴게소에서 커피 마시면서 쉬엄쉬엄 가면)대략 6시간 정도의 거리라고 해야 더욱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점점 '좁아지는'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세계의 크기를 미터법으로 환산한 단위가 아닌 '일정'으로 표현한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인한다. 소설 속 배경인(그리고 저자가 실제 작품을 쓰기도 한) 19세기 후반엔 80일 동안.. 더보기
고스트 라이터: 이렇게 거대한 음모 판을 너무 크게 벌렸다. 이 정도까지 갈 줄은 몰랐다. 로버트 해리스의 고스트 라이터(원제 The Ghost)는 분명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소설인데, 마지막 장까지 다 넘긴 다음엔 맹랑한 만화를 한 편 본 기분이다. 이렇게 장대한(?) 작가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해야 할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하긴 정치인이란 작자들은 가끔 만화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긴 한다. 바로 그래서 고스트 라이터 같은 작품도 나오는 것일 게다. 소설 속의 전직 영국 수상 애덤 랭은 명백히 토니 블레어를 연상시킨다. 집권 기간 내내, 특히 이라크전 국면에 와서 '(아들)부시의 푸들'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미국의 의견을 추종했던(그러면서 자국의 국익을 위해 가져간 건 하나도 없는) 건 도대체 그의 성분(?.. 더보기
살육에 이르는 병 by 아비코 타케마루 주의: 본 글에는 스포일러는 없으나, 19세 미만 청소년 및 만삭의 임산부나 심신 허약자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는 잔혹한 묘사가 있으니 이게 영 켕기면 백스페이스 키를 지긋이 눌러주시고, 그럼에도 꼭 봐야겠다면 스크롤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 . . . . . . . . . . . . . . . . . 자, 나름 강력한 경고 문구에도 당신은 스크롤을 내렸다. 당신은 청소년이나 만삭의 임산부나 심신 허약자는 분명 아닐 것으로 믿는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포스팅의 정체(?)를 사전에 밝혔을 때의 맥빠지는 기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므로. 본 포스팅에는 책에서 나온 것과 같은 잔혹한 묘사 따위는 없다. 낚인 분들께는 죄송. 그런데 왜 뜬금 없이 위와 같은 경고 문구를 쓴 건가?.. 더보기
웃기고 재미있는, 멋진 징조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신(神)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맞다. 사실 신은 주사위 놀음보단 카드 게임을 즐기는데, 방 안은 완전히 어둡고, 카드에는 아무런 그림도 없으며 심지어 이 게임에는 룰도 없다. 판돈은 어마어마하고, 딜러는 룰을 가르쳐 주는 대신 내내 썩소만 날리고 있다" 테리 프래챗, 닐 게이먼 공저인 멋진 징조들의 원제는 'Good Omens'이다. '오멘'이라는 단어에서 그 옛날 동명의 영화를 연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이 소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인간 세상에서 굴러먹다 보니 너무나도 '인간'에 가까워진 악마, 고서점을 운영하는 책 오타쿠 천사, 그리고 이 세상에 마지막을 선사하고자 선택된 적 그리스도. 그리고 그들 외에도 나름 심각.. 더보기
책 소개: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 아침에 신문을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니, 뭐 2MB의 계속 이어지는 삽질이나 기타 등등의 개그 때문에 웃은 게 아니다. 실제 기사 그대로가 바로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였다. [내 책을 말한다] 아빠를 위한 여행 처방전: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 (서울신문) 위에 링크한 기사는 꼭 보시라. ㅋㅋㅋㅋ 전업작가인 이용재씨가 직접 작성한 기사는 유려함이 넘친다. 왠지 까칠하면서도 똘망똘망할 것만 같은 그의 딸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가 쓴 책, 아직까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실망시킬 것 같지는 않다.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이용재 (디자인하우스, 2009년) 상세보기 더보기
크래쉬와 태양의 제국 작가 J.G.발라드 별세 크래쉬, 그리고 태양의 제국. 각각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을 맡은 영화 두 편의 원작자이자, 살아 생전에는 디스토피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SF 작품으로 유명했던 영국 작가 J.G.발라드(James Graham Ballard)가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1930년에 태어났으니 본토식으로 따지면 향년 78세.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생전에 30여 편의 단편/장편 소설을 썼으니 과작은 아니지만, 국내에선 그리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번역되어 소개된 작품조차 2편에 지나지 않는다(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태양의 제국'과 '크리스탈 왕국'이 출간되었지만 현재는 다 절판이 되었고,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논쟁적이라고 할 '크래쉬'는 아예 국내엔 나오지도 않았다). 1960년대와 70년대.. 더보기
악인: 죄와 벌에 대한 21세기 일본의 대답 최근 몇 년 동안, 살짝 가벼운 코미디 소품이나 추리물 위주의 일본 소설들이 국내에 꽤 많이 알려졌다. 과문한 글쓴이는 그들 중 몇 작품을 구해 읽었는데 그 선택에 있어서 다분히 트렌디한 감성의 소유 여부 쪽으로 흐른 게 사실이다. 여러 모로 국내에서 No.1 블로거라고 할 만한 레진사마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추천한 책이 아니었다면(ㅎㅎ),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 또한 그냥 묻혀버리고 말았을지도. 그렇다고 이 작품이 뭐 엄청나게 대단한 문학적 완성도를 지녔다는 건 아니다. 그저 많고 많은 일본 소설들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는 것 정도? 상당히 자극적(?)인 포스팅의 제목은 사실 악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그 내용 측면에서 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 더보기
브이 포 벤데타: 400년 전의 복수가 여전히 유효한 현재 전체주의의 무서운 점은, 개별적 인격체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나는 다르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다르며, 내국인과 외국인은 다르다. 당연하다. 이렇게 명백하게 당연한 사실은 주로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당사자가 설정한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걸, 도무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의 시각에 의하면 일탈행위를 일삼는 불순분자(?)들은 차별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앨런 무어, 데이비드 로이드 공저인 그래픽 노블 '브이 포 벤데타'는 사실 국내에선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액션 영화로 유명하지만 위에 이야기한 전체주의의 위험을 고발하는, 아주 유려하고 매혹적인 작품이다(글쓴이는 영화를 보진 못했는데, 원작의 주제의식 말고는 별로 볼 게 없는 영화라.. 더보기
경제 저격수의 고백 by 존 퍼킨스 여기 한 사채업자가 있다. 원래부터 갖고 있는 자본이 풍족한 그는 공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하며 사업을 키워나간다. 다른 사채업자들이 (예비)채무자의 지불 능력, 그러니까 결국 꾼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인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인데, 그에겐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그는 누가 봐도 찢어지게 가난해서 오히려 돈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없을수록 선선히, 더 많이 빌려준다. 지금 마이크로크레딧이나 사회연대은행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정말 악랄한 독종이어서, (예비)채무자가 평생을 가도 못 갚을 돈을 왕창 빌려주고, 그 댓가로 신체포기각서를 쓰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악랄한 사채업자란, 바로 미국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이 지금도 백주대낮에 국제 사회에서 행하는 짓거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