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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살육에 이르는 병 by 아비코 타케마루



주의: 본 글에는 스포일러는 없으나, 19세 미만 청소년 및 만삭의 임산부나 심신 허약자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는 잔혹한 묘사가 있으니 이게 영 켕기면 백스페이스 키를 지긋이 눌러주시고, 그럼에도 꼭 봐야겠다면 스크롤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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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나름 강력한 경고 문구에도 당신은 스크롤을 내렸다. 당신은 청소년이나 만삭의 임산부나 심신 허약자는 분명 아닐 것으로 믿는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포스팅의 정체(?)를 사전에 밝혔을 때의 맥빠지는 기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므로.

본 포스팅에는 책에서 나온 것과 같은 잔혹한 묘사 따위는 없다.

낚인 분들께는 죄송. 그런데 왜 뜬금 없이 위와 같은 경고 문구를 쓴 건가? 궁금하다면 바로 아비코 다케마루 작 '살육에 이르는 병'의 고도의 낚시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책을 보기 전에는 이 작품의 내용이나 저자에 대한 사전 지식은 전혀 없었는데, 책 날개의 저자 프로필을 보니 예전에 국내에서도 소수의 열광적인 팬들을 끌어모았던 사운드 노벨 게임 '카마이타치의 밤'(국내에선 온라인으로 컨버전되기도 했다)의 원작자라고 한다. 그래서 관심이 갔다.

정말, 책에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잔혹한 묘사들이 넘쳐난다. 여기에 비하면 슬래셔 무비는 그저 애들 장난으로 여겨질 정도로. 따지고 보면 미스 마플이나 포와로 경감 등이 등장하는 고색창연한 추리소설이나 최근의 어지간한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범죄자의 범죄 행위(주로 살인)에 대해선 세부적인 묘사가 그리 많이 나오진 않는다. 이건 굳이 그걸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범죄자의 심리나 인간 관계가 중요한 거지, 범죄자가 어떻게 살인을 했는지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에는 그런 잔혹한 묘사가 나온다. 그건 필요하기 때문에 나오는 거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범죄의 정당화(?)다. 이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도대체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지 그 이유가 바로 그의 행위 전반을 통해 드러난다.

오른쪽 귀퉁이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써있고 심지어 서점에선 코믹스처럼 랩핑까지 되어서 진열된다고 하니 작심하고 내용을 통째로 들려주겠다는 친구가 옆에 있지 않고서야 책을 사보는 것 외에는 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몸소 느낄 방법은 없을 것 같다. 아주 흥미롭고, 진행도 빠르며, 무엇보다 재미있다.


하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을 이야기하면서, 빼먹을 수 없는 부분은 이 작은 책을 둘러싼 노란색 껍데기(?). "나는 속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독자를 위한, 마지막 한 페이지! 모든 것은 단 한 줄로 허물어진다" 그리고 또 있다. "주의! 순서대로 읽기를 권합니다. 절대로 결말이나 해설을 먼저 보지 마세요" 마지막 페이지까지 와선 일부를 손으로 가리면서 읽기까지 했을 정도니.

반전, 트릭, 다 좋다. 그런데 "나는 끝에 가서 죽여주는 반전이 있어! 그러니까 진작부터 미루어 짐작하진 마! 하여튼 죽여주니까"라는 이야기를 들은 상태에서 듣는 이야기와,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로 멍~하니 있다가 순식간에 얻어맞는 이야기, 둘 중 어느 쪽이 독자에게 더 황홀한(?) 체험을 줄까. 이건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유주얼 서스펙트'와 '식스 센스'에 그토록 엄청난 반전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영화를 본 관객과, 정말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저 그렇게 보다가 막판에 가서야 밝혀진 반전을 오롯이 처음 느낀 관객이, 영화에 대해 갖는 태도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물론 출판사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의 결말을 미리 알고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 하지만 랩핑까지 된 책에 굳이 이렇게 2중 3중으로 으름장(?)을 놓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고도의 낚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일부, 싼 입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오죽했으면 출판사가 저런 장치까지 마련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 그리고 또,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 수준으로 막판 반전(혹은 트릭)을 꽁꽁 감춘 소설이나 영화의 리뷰를 보면 "난 미리 알고 있었는데(그래서 시시한데)?"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꼭 있다. 그건 별로 잘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릇된 편견이며, 그야말로 온전한 문화적 체험을 결코 겪지 못하게 하는, 살육(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불쌍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