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본 건, 학교 때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보고 난 이후 처음인 것 같다(솔직히 내 취향은 한림원의 그것과는 한참 멀다). 물론 꼭 노벨 문학상이 아니더라도 포르투갈 출신의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는, 그리고 그의 작품은 워낙 유명세를 떨쳤기에 언젠가는 한번 봐야지 내심 점 찍고 있다가, 이제서야 봤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별 연관은 없어 보이는, 남미 환상문학의 정수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과감한 설정을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그러나 그 행간으로부터 독특한 문화적 감수성과 동시에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렇게 고리타분한 표현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실이 그렇다)을 읽을 수 있는 바로 그런 작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이 실명을 한다. 심지어는 안과 의사조차. 이런 설정만 두고 보자면 무진장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것만 같지만 중요한 건 그런 상황이 아니라 바로 그런 상황에 놓인 인간들과, 인간들의 행위인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인 돌뗏목이란 제목의 작품은, 무려 이베리아 반도-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사람이다-가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태평양을 표표히 흘러다닌다는(?) 이야기다(마치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집시의 시간'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작품이 특이한 게 있다면, 원작의 감수성을 그대로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따옴표가 하나도 없다. 무슨 소리냐면 등장인물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가 그냥 주루루룩 흘러간다는 이야기다. 포르투갈어는 전혀 모르지만 책 말미의 역자 후기를 보면 원작이 바로 그런 식으로 되어 있고 그와 같은 새로운 문학적 시도가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높은 평점(?)을 받았다고.
그렇게 따옴표가 하나도 없기에 책의 활자는 무진장 빽빽하다. 그래서 읽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작품이다. 사람이,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에 몰렸을 때 과연 어떤 행동을 할 것이며 정작 선악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까지, 참으로 인상 깊었던 소설이다.
덧붙여, 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곧 있으면 국내에서도 개봉할 예정이다.
120%짜리 전율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 '시티 오브 갓'을 연출한 브라질 출신의 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줄리안 무어, 그리고 안대를 한 노인 역의 대니 글로버와 악당 역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게는 일단 안심이지만, 감독이 할리우드로 건너가 처음 연출한 '콘스탄트 가드너'는 솔직히 기대보단 못했고 더 중요한 건 예고편을 보니 원작'만'을 완전히 그대로 베낀 듯한 모습을 본 것 같은 게, 좀 입맛이 찜찜하긴 하다(주로 일본에서, 유명 만화/애니메이션을 실사 영화화할 때 이런 꼴을 종종 봤다).
그래도 아직 개봉조차 하지 않은 영화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