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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제5도살장> by 커트 보네거트: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풍자



신랄하기로 유명한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보기 전에, 난 이 제목의 '도살장'이 무슨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거나 은유적인 표현일 것으로 생각했다. 근데 이게 왠 걸. 진짜로 소 잡고 돼지 멱 따는 바로 그 도살장이었다.

사실 작가인 커트 보네거트 스스로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시치미 뚝 떼고서, 마치 실재했던 이야기를 논픽션 쓰듯이 그렇게 줄줄줄 풀어간 걸로만 보인다. 소설 속 주인공 빌리 필그림(주인공의 성씨가 '순례자'를 뜻하는 필그림인 것은 의미심장하다)이 진짜로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자신이 시간여행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믿었던 것처럼 말이다.

<제5도살장>을 이야기하면서, 2차 세계대전 최악의 작전이었던 드레스덴 공습을 빼먹을 수는 없다. 1시간의 짧은 공습 동안 군인과 민간인 가리지 않고 무려 16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드레스덴 공습이 이렇게 감수성 예민한 작가에게 끼친 영향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또 어찌어찌 하다 보니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 심약한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드레스덴 공습이 벌어지던 바로 그 때 드레스덴 시 외곽의 '제5도살장' 지하에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실제로 드레스덴은 독일군 입장에서도 연합군 입장에서도 전략적 가치 따위를 찾아보기 힘든 고도(古都)에 불과했고, 수십만 톤에 달하는 폭탄이 그들 머리 위로 떨어지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제5도살장' 지하로부터 지옥불이 휩쓸고 간 자리에 스멀스멀 기어 나온 일단의 독일군 병사들과 미군 포로들은 산 채로 온 몸이 타들어가는 사람들과, 시체를 먹고 몸집이 들개 만큼 커져버린 쥐떼, 그리고 마치 달표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완벽하게 폐허가 된 지상을 만난다.

전쟁은 이성(理性)과 합리성을 패대기친다. 하긴 인간이란 존재가 그런 걸 갖고 있었다면 애초부터 전쟁이란 걸 시작도 안 했겠지.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그리고 작가가 허무맹랑한 외계인의 존재를 설정하고 더 허무맹랑한 시간여행을 생각한 것, 그리고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시시때때로 내뱉는 "(누구나 살다가)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을 나약한 현실 도피라고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절로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풍자와 블랙 유머란, 바로 이런 것이다.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