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직거리는 '삐짜' 비디오로 이블데드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사실 굉장히 난감했다. 도대체 언제 웃어야 할지 모르겠고, 언제 무서워해야(?) 할지 몰라서. 장르는 분명 호러가 맞는(것 같긴 한)데 전체적으론 웃긴다. 그것도 그냥 씩 웃고 마는 게 아니라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게 하는 상황.
영화에서 웃긴 장면 나오면 웃으면 되고, 무서운 장면 나오면 무서워하면 되는 건데 그걸 몰랐단 것도 따지고 보면 웃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어떤 영화든 신병 대기마냥 각을 딱 잡고 앉아서 이렇게 저렇게 뜯어보는 게 나름 영화를 공부하려 한다는 이의 마음가짐 비스무리한 것이었고, 실제 주위의 많은 친구들도 그랬다.
영화 관련 서적이라면 '영화의 이해'와 '세계영화사' 딱 두 권만 있던 시절, 정작 영화는 볼 수가 없었는데도 시민케인 = 딥 포커스/전함 포템킨 = 몽타쥬를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고 다녔던 시절이기도 했다.
물론, 영화의 이해와 세계영화사 그 어느 책에서도 샘 레이미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로드쇼' 정도가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이블데드 같이 생긴(?) 영화는 아예 쳐다 볼 일조차 없었을 것이며,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자유로워야 마땅할 문화 창작(혹은 비평)의 공간까지도 엄숙주의의 무거운 공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설이 길었다. 소위 B급 취향이란 매우 개인적인 것이어서 다수에게 어필하진 못한다. 다만 현재 국내에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봉준호, 박찬욱 감독 등이 모두 '알아주는 영화광' 출신이고 그들의 작품 대부분에서 적게, 혹은 많게 그닥 대중적이지 못한 취향을 간파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그러면서 흥행에는 대부분 성공한다. 한국영화 사상 최다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가, 장르의 클리셰를 잔뜩 비튼 장르 영화인 '괴물'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동안은 '드래그 미 투 헬' 수준의 노골적인 B급 취향을 풀풀 풍기는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시차 적응(?)이 잘 될지 내심 걱정했는데 이내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역시 '이 바닥'의 영웅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 같이 심심한 영화, 샘 레이미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샘 레이미는 누가 뭐래도 '삐짜'의 본좌다!
그리고 영화도 완전 짱이다! 무진장 재미있다.
스토리를 주워 섬기는 일 따위, 필요도 없다. 그저 롤러코스터에 탄 기분으로 온몸의 기운을 쫙 빼곤 편안히 앉아서 이 거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A급 수준으로 매무새를 잘 다듬은 이 노골적이고 상큼한 코믹 호러를 즐기면 되는 거다.
- 러닝타임 내내 객석에선 공포의 비명보단 웃음소리가 더 많이 나온다.
- 예쁜 처녀 혼자 사는 집에 무슨 프라이팬은 그리 많으며, 난데없이 모루(-_-)는 또 왜...
- '현찰' 1만 달러의 위력은 생각보다 크다.
-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하나 나오는데, 왜 그는 하필 동양인일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