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라는 배우가 '국민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게 된 계기는 지난 1980년부터 시작된 TV 드라마 '전원일기' 덕분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바로 그런, 자상하고 포용력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김혜자씨를 주연으로 하는 영화 '마더'의 원안을 떠올리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고 있다.
사실 김혜자씨가 마더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전원일기를 비롯해서 기타 다른 드라마에서의 모습과 그리 다르진 않다. 지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아들을 위해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 바로 그것인 게다. 다만 마더에선 아들을 위하는 행위 자체가 보다 '영화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
정신 장애가 있는 아들이 살인 누명을 쓰고 경찰에 잡힌다. 이제 어머니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노력한다. 이 정도가 영화 마더를 보기 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정보의 전부다. 그런데, 이게 왠일. 영화는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게 아닌가. 이럴 땐 보기로 마음 먹은 영화에 대해 사전 정보를 아예 얻을 생각도 안 하는 게 훨씬 좋다.
따지고 보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매우 의외의 결말로 치닫곤 했다. 살인의 추억에선 연쇄살인범을 잡으려는 형사들이 나오지만 결국 범인은 누군지도 모르고, 잡지도 못한다. 괴물은 또 어떠한가. 괴물은 '괴물 영화'가 아니었고 괴물 그 자체는 그저 거대한 메타포였다.
그렇게 의외의 내용이 이어지지만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이루는 모든 대상의 아귀를 딱딱 들어맞게 꾸밀 줄 알고, 그 형식은 매우 유려하다. 그의 대부분 영화가 스릴러라는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지만 내용상으론 매끈한 블랙코미디로 인식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몸 풀듯이 찍었다"는 취지의 봉준호 감독 인터뷰 기사를 우연찮게 봤다. 영화 자체는 소박한 소품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의 무게는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머리를 무겁게 누른다. 특히나 주연인 김혜자씨의 광기 서린 연기는 최근의 그 어떤 한국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고 조연인 진구, 윤제문 등의 배우도 자신의 자리를 잘 잡고 있다. 다만 원빈의 연기는 조금 불만.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도준 역은 누가 맡았어도 쉽진 않았을 거란 생각은 든다(그리고 김혜자씨와 원빈의 얼굴을 교차해서 보니 큼지막한 눈망울이 참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에서도 대사로 나오고).
글쓴이 능력의 한계이겠지만, 스포일러를 요리조리 피하려다 보니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어쨌든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봉감독, 재기발랄함과 영리함에 이제 노련함까지 갖췄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앞으로 보여줄 게 훨씬 더 많을 듯한 이 젊은 감독의 다음 작품은 프랑스 만화가 원작이며 많은 다국적 스탭들이 참여하는 SF 대작(게다가 제작은 박찬욱 감독이 대표로 있는 모호필름에서 맡는다) '설국열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