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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한 스파이의 자아 찾기, '레전드'(by 로버트 리텔)




자신의 진짜 정체를 잃어버린 스파이의 이야기라면, 영화로서도 큰 인기를 모았던 제이슨 본 시리즈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리텔 작 '레전드'는 그와 많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또한 다르다.


CIA 현장 요원 출신이며, 현재는 단골 식당 손님의 노름 빚을 청산하는 일 아니면 불륜 현장을 필름에 담는 일 정도 하는 사립탐정이 있다. 그는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늙어 죽을 때까지 하품이나 늘어지게 하면서 지루하게 사는 게 꿈'인 사람. 그런 그의 앞에 묘령의 여인이 나타나서 사라진 형부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한다... 아니, 이건 너무 전형적이잖아.

확실히, 그의 수사를 방해하는 인물들이 나타나고(심지어 CIA 시절 그의 상관까지) 목숨이 위협을 받는 상황까지 이르고 하는 것은 고전 탐정소설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21세기형 하드보일드? 글쎄,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조금)더 복잡하다.


이 책에서 '레전드'라고 하는 것은 CIA나 KGB, 혹은 이스라엘의 모사드 같은 정보 기관에서 암약하는 스파이의 위장 신분을 말한다. 그게 그냥 여권이나 신분증 정도만 적당한 이름으로 만들어 넣는 수준이 아니라 완벽하게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 대학교수의 신분을 만든다고 하자.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어디며, 논문 주제는 무엇이며, 가계도는 또 어떠하며, 개인적인 버릇이나 신체적 능력까지 그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레전드'의 인물이 된 스파이는 아예 바로 그 인물이 되어야 한다. 아니, 된다. 그래서 종국엔 그 여러 가지 '레전드'들 중에 정말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며... 여기에서 더 들어가면 스포일러가 되니 이 정도로.


이와 같은 내용을 다룬 소설 치고는 상당히 독특한 매력과 재미를 준 작품이었다. 탐정 느와르, 첩보 스릴러, 하드보일드 서스펜스, 그 어느 한 장르로 놓기에는 부족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장르를 포함하기도 하고.

조금 과장하자면, 레이먼드 챈들러 + 로버트 러들럼 + 존 르 카레의 작품을 한 권으로 읽은 듯한 느낌? 로버트 리텔이란 작가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게 그리 많지는 않은데, 꼭 구해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