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만빵입니다. 주의하시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같이 영화를 봤던(것 같은) 3명의 고딩-정도로 보이는-친구들이 농을 했다.
"야, 다크 나이트면 '흑기사' 아니냐"
"그래, 흑기사. 누구 대신 술 먹어주냐? ㅋㅋㅋ"
'흑기사'란 이는, 평소에는 그 존재감을 감추고 산다. 그러면서 다 같이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는 여성(아니면 동성?)이 고난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타나는 존재다. 그러고는, 대개, 그 자리가 파하면서 그 존재는 잊혀진다. 그러나 우리의 다크나이트는 속으로 되새긴다.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또 해야지(?).
2억 5천만 달러 짜리 아찔한 블록버스터의 결말을, 우리의 주인공이 경찰들(과 경찰견들)로부터 쫒기는 엔딩으로 마무리한 이 희한한 영화가, 영웅 배트맨이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해 컴플렉스를 느끼게 되는 상황을 연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배트맨'이, 스스로 '흑기사'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트맨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고, 그걸 어떻게든 까발리려고 하는 인간(까지 나온다. 이 영화에는!)은 조커의 살생부에 리스트가 오른다. 가장 극적인 심경의 변화를 겪는 인물인 투페이스는 심지어 바로 자기가 배트맨이라고 거짓말까지 한다.
배트맨이 '배트맨' 대신 '다크나이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악을 처단하는 정의의 존재인 배트맨이 사라지는 날이야말로 고담시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는 날이기 때문에(하지만 그런 날은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현실감 만땅인 이 현대판 영웅의 신화는, 적어도, 제작사의 경제적 이윤 창출을 위해서라도,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속 보이는 발언이지만 이 세상이란 게 원래 그렇다.
"왜 그렇게 심각해?" 뭐 당연한 말이겠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즐거운(?) 인물은 故 히스 레저가 분한 조커다. 자신의 신념을 자신의 방식대로 관철하는 인물이기에. 일개 사이코패스인 범죄자가 저 대사를 읊었을 때 벌써 이 영화가 선택한 노선은 명백해진 것이다.
150분이 넘는 러닝 타임 내내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고, 모든 캐릭터에게는 하다 못해 고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리는 연기(?)조차 정당성을 부여하며, 놀랍도록 탄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영화가 적어도 올 여름 최고의 영화가 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덧)
히스 레저의 사인은 약물 남용으로 밝혀졌는데, 솔직히 누가 봐도 명백하다. 그는 다크나이트 때문에 죽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도로 조커에 몰입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죽음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맘이 짠하다.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