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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크래쉬와 태양의 제국 작가 J.G.발라드 별세



크래쉬, 그리고 태양의 제국. 각각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을 맡은 영화 두 편의 원작자이자, 살아 생전에는 디스토피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SF 작품으로 유명했던 영국 작가 J.G.발라드(James Graham Ballard)가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1930년에 태어났으니 본토식으로 따지면 향년 78세.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생전에 30여 편의 단편/장편 소설을 썼으니 과작은 아니지만, 국내에선 그리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번역되어 소개된 작품조차 2편에 지나지 않는다(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태양의 제국'과 '크리스탈 왕국'이 출간되었지만 현재는 다 절판이 되었고,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논쟁적이라고 할 '크래쉬'는 아예 국내엔 나오지도 않았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그는 주로 가까운 미래, 혹은 시공간은 모호하지만 분명 당시의 '현재'와는 다른 시공간에서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디스토피아를 창조했다.

이는 그의 과거와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희한하게도 그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며,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강제수용소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그의 이런 과거사는 후에 자전적 소설인 태양의 제국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했다(덧붙이자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바로 그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미 역을 맡았던 배우는 바로 크리스찬 베일이다).



그의 저작들 중 아마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할 작품이라면 당연히 크래쉬. 영화의 선정성과 일부 삭제 논란으로 뜨거웠던 바로 그 영화를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몹시 불편한 좌석에 앉아 관람한 기억이 생생하다.

신체의 훼손, 그리고 기계로의 대체를 로버트 로드리게즈와 타란티노는 참 코믹하게 그렸지만 "영화화 불가능"이라고 했던 발라드의 원작(그런데 영화화 불가능하다고 해놓고 영화화가 되는 경우는 참 많다...)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영화에선 극단적인 욕망의 표출로 그린다. 심지어 작가 자신은 자신의 이 논쟁적인 작품을 두고 '테크노 포르노'라고까지 했다.



속도의 전쟁이 매일 펼쳐지는 현대 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자동차에 대한 물신주의,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자동차의 이 차가운 동체와 정신적이면서도 육체적인(?!) 교감을 나누는 사람의 모습은 분명 일반인의 시각으로 봤을 땐 어딘가 이상해야 당연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기괴한 모습이, 발라드가 제시한 현대인의 비전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작가의 탁월한 감수성 덕분인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지금 감상하는 대상으로서의 SF는 태생부터 디스토피아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암울한 일들이 지금 우리 곁에서 종종 실제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하면 입맛이 쓰다. 그 옛날 작가들의 통찰력(?)을 높이 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