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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 박지성을 몰랐다


대한민국에서 축빠로 살면서 박지성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고. 지금 막 끝난 MBC 스페셜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를 보고 나니 이전에는 몰랐던(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던) 부분 하나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가 왜 지금 세계 최고, 최대의 축구 클럽이라는 맨유에서 뛰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가 다른 팀이 아니라 맨유에서 계속 뛰어야만 하는지를.

그가 오늘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무수히 많은 일화들은 저 프로그램에 다 나와있다. 고교 졸업 후 대학의 지명을 받지 못했던 일이나 이후 꾸준히 실력을 발휘해 올대와 02 월드컵에서 국대로 발탁된 일, 그리고 PSV로 가게 된 일 등등.

그만큼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유명인이 과거의 어느 한 때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것 또한 어불성설일 터.

영국의 한 미디어는 그를 두고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유형의 선수'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즉 빠른 템포로 공수가 급격히 전환되는 현대 축구에서 수비력을 갖춘 윙어의 모델로서 박지성을 제시한 것. 그런데 사실 그보다는, 박지성은 이전엔 한국 스포츠에선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선수라는 것이 MBC 스페셜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를 보고 글쓴이가 느낀 점이다.

현재의 박지성은 '해외의 선진 리그에서 뛰는 한국 선수 가운데 사실상 최초로 스스로 원했던 자아를 실현하고 있는 선수'라는 것이 바로 내 생각이다.

항상 열심히 뛰고 헌신적이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지적은 맨유에서 뛰는 박지성이 거의 항상 받는 지적이다. 그 이전을 생각해 보자. J리그에선 거의 혼자 힘으로 2부리그 팀을 우승(일왕배)시키기도 했고 PSV에서는 잠시 동안이나마 골게터로 불리기도 했다. 즉, EPL이 아니고, 맨유가 아니라면, 그래서 더욱 출장의 기회가 많아지고 그를 중심으로 팀 전술 자체가 변화한다면(국대 경기에서 캡틴으로 뛰는 그를 생각해 보자) 더 많은 골과 공격 포인트를 낚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당대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던 차범근을 생각해 보자. 항상 스스로를 민간 외교관으로 생각했다는 그. 한국이란 나라가 세계 무대(스포츠건, 외교건)에서 노출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당대에는 이게 당연한 생각이었을 것이고, 그건 나무랄 수 없는 수준을 넘어서 지극히 훌륭한 생각이다. 개인 사정을 들어 지난 WBC 2009에 불참한 박찬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어지간한 스포츠에서 발현되기 마련인 국가주의의 그늘을, 이들 당대의 스타들은 피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맨유의 박지성은 국내외의 새털처럼 많은 축구 선수들이 갈망하는 최고 수준 리그의, 최고 수준 클럽에서 뛰고 있다. 단 10분을 뛰어도, 20분을 뛰어도, 심지어 벤치만 데우고 있을지라도 그는 맨유에서 뛰기를 원했고, 결국 그 꿈을 이뤘다. 그리고 그 팀에서 감독과 동료들, 그리고 팀 스태프들의 하나 같은 지지를 받고 있다. 코흘리개 초딩 때부터 항상 원했던 자리에 오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EPL이 아니고, 맨유가 아닌 팀에서 어시스트왕 타이틀을 차지하거나 혹은 골게터로 이름을 날리기를(물론 보장은 없지만) 박지성이 원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순하게만 보이는 서른 살 청년은, 지금 바로 자아를 실현하고 있는 중이다.


덧붙이자면 프로그램 인터뷰 중 스스로 바지를 걷어 무릎 수술 자국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한눈에 척 봐도 크고 작은 상처 투성이의 다리, 그리고 발목을 보면서 눈시울이 울컥했다. 지금의 나는 예전부터 원했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만큼의 노력을 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