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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악인: 죄와 벌에 대한 21세기 일본의 대답



최근 몇 년 동안, 살짝 가벼운 코미디 소품이나 추리물 위주의 일본 소설들이 국내에 꽤 많이 알려졌다. 과문한 글쓴이는 그들 중 몇 작품을 구해 읽었는데 그 선택에 있어서 다분히 트렌디한 감성의 소유 여부 쪽으로 흐른 게 사실이다.

여러 모로 국내에서 No.1 블로거라고 할 만한 레진사마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추천한 책이 아니었다면(ㅎㅎ),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 또한 그냥 묻혀버리고 말았을지도.

그렇다고 이 작품이 뭐 엄청나게 대단한 문학적 완성도를 지녔다는 건 아니다. 그저 많고 많은 일본 소설들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는 것 정도? 상당히 자극적(?)인 포스팅의 제목은 사실 악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그 내용 측면에서 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일단' 이야기한다.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현장에서 피해자의 신원을 알 만한 단서가 발견되진 않지만 우리 독자들은 피해자인 그녀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곧, 딱 범인일 듯한 인물도 밝혀지는데 알고 보니 그는 진범은 아니다. 그리고 또 얼마 안 있어 진범이 밝혀지고 난 다음부턴 시점이 확 바뀌어서 진범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혹은 후기) 위주로 작품이 진행된다.

작품의 제목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지은 '악인(惡人)'이다. 모종의 범죄 혹은 사건을 다루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범인이 사이코패스가 아닌 다음에야 범인보다는 오히려 주변의 인물들이나, 심지어는 피해자(!)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악인이 아닐까, 라는 상상력은 정작 작품을 읽기 전부터 많은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이 작품은 제목부터 스포일러다).

잠깐 죄와 벌을 생각해 보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잔인무도하게)살해했을 때 주인공이 정말 때려 죽여 마땅할 나쁜 놈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나? '악인'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금 국내에 소개된 일본 문학 작품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벼움 대신 무거운 주제를 무겁게 다룬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시대적/사회적/문화적 환경의 측면에서 새롭게 옷을 갈아 입은 '죄와 벌'이다. 인류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 작품에 대한, 21세기 일본의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