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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처절한 우화, 갈라파고스(by 커트 보네거트)

 

 

 

 

간담이 서늘해지는 블랙 유머와 풍자로 유명한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갈라파고스'. 초반에 보면 작중 화자(이 작중 화자 또한... 상당히 괴이쩍은 존재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가 '1백만년 전, 그러니까 1986년'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처음엔 이게 그냥 다소 과장한, 유머러스한 표현인 걸로 생각했다. 근데 이게 왠일.

 

저기에서 1백만년 전이라고 하는 건 '실제로' 지금으로부터 1백만년이 흐른 뒤에 하는 말인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을 읽기 전에, 제목의 도살장이라고 하는 표현이 뭔가 은유적인 걸로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소 잡고 돼지 멱 따는 도살장인 걸 알았을 때의 당혹감;;이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아직 읽지는 않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고양이 요람'에선 정말 고양이 요람이 나올려나?

 

사실 커트 보네거트는, 언제나 하던 식으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이 작품 '갈라파고스'에서도, 전세계 인류의 절멸 사태를 운좋게(혹은 운 나쁘게?) 피한 소수의 인원이 갈라파고스 제도의 외딴 섬에서 지지고 볶다가 결국 1백만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만다는 이야기를, 굉장히 건조하고도 동시에 유머러스하게 술술술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실제로 세계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러고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몰상식적 행위 중 하나라고 할 만한 드레스덴 공습을 직접 목격하고('제5도살장'의 배경), 이제 정말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고 느꼈을 법하다. 그럼에도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는 말년까지도 9.11 테러로 인한 트라우마, 즉 (미국 내에서의)외국인 혐오증을 경고했고 미국의 이라크전을 비판했다. 커트 보네거트에게는 물론 '미국 현대문학의 정수'라는 칭송이 따라다니지만, 그게 그저 이 작가의 글재주만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란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이후에 그가 있었고, 코맥 매카시 이전에 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 중에는 '제5도살장'과 '갈라파고스' 딱 두 권만 읽었는데... 홀딱 빠졌다. 빨리 나머지 책들도 구해서 읽어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