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s

80일간의 세계일주(열림원 판) by 쥘 베른




1.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얼마?"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 450Km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생생하게 느껴지질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거의)오차가 없는, 명확한 단위에 의한 표현조차 감이 잡히질 않는다. 천릿길이라고 하면 좀 나으려나.

그보단 비행기로 40분 내외, KTX로 3시간, 승용차로 (휴게소에서 커피 마시면서 쉬엄쉬엄 가면)대략 6시간 정도의 거리라고 해야 더욱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점점 '좁아지는' 세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세계의 크기를 미터법으로 환산한 단위가 아닌 '일정'으로 표현한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인한다.

소설 속 배경인(그리고 저자가 실제 작품을 쓰기도 한) 19세기 후반엔 80일 동안 세계를 한 바퀴 도는 건 아직 임파서블한 미션이었지만, 여기에 도전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2.
쥘 베른이 유명세를 탄 대부분의 작품들, 예컨대 '해저 2만리'나 '달세계 여행', 그리고 '지구 속 여행'과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은 일견 허무맹랑한 판타지 비스무리하게 여길 수 있다.

실제 '달세계 여행'이나 '지구 속 여행'에선 그야말로 SF(Science Fiction은 어디까지나 '과학소설'이지 '공상과학'이 아니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가득하다. 달나라에서 방아 찧는 토끼 대신(;;) 로봇을 만나질 않나, 땅 속에서 난데 없이 공룡을 만나질 않나.

그러나 위의 작품들에서도 당대의 기술을 표현하는 부분에선 대단히 치밀한 묘사를 볼 수 있으며, 고증도 철저하다. 달에 갔더니, 땅 속에 갔더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암석 쪼가리만 있더라, 하고 끝나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이 아닌가. 우리가 쥘 베른의 작품들에서 보는 판타지는 나름 과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한, 작가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3.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말 그대로 런던에서 출발해서 80일의 기간 동안 동쪽으로 끊임 없는 여행을 하며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도중에 주인공 일행은 몇 번의 고비를 겪긴 하는데, 하여튼 그런 단순한(?) 여행의 기록이 작품의 전부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다분히 인종차별적이고 오리엔탈리즘에 철저히 입각한(?) 시각 등은 한계가 있으나, 쥘 베른의 다른 유명 작품들이 다소 무거우면서도 판타지 성향이 다소 강했던 것에 비하면 꽤 담백한 맛이 있다.

덧붙이자면 열림원 판 쥘 베른 컬렉션(너무 일찍 절판된 게 아쉽다)은 군데군데 삽입된 삽화도 분위기 제대로 살려준다.


P.S:
성룡이 나왔던 동명의 영화는 보질 않았는데 평을 보면 좀 아닌 모양이다. 1956년에 영화화가 된 버전도 보질 못했지만 원작의 분위기만 놓고 보자면 완고하고 철두철미한 영국 신사로 데이빗 니븐이 주인공으로 나왔는데 아주 그럴싸한 이미지 캐스팅이라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