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s

동서미스테리북스 몇 권

이하의 포스팅 역시 이전 블로그에서 살포시 가져온 내용.
---------------------------------------------------------------------------------


지난 여름에 필리핀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거길 가기 전에 책 몇 권을 구입했다. 가뜩이나 더운 나라에 그것도 휴양을 하러 가는데 머리 복잡한 책 본다고 해봐야 몇 페이지 못 넘길 것 같아서 '가볍고' '저렴한' 책을 몇 권 사서 갔는데 제대로 보진 못했다. 어쨌든,
 
그 책들 중 몇 권은 바로 '동서미스테리북스' 시리즈였다. 지금의 동서미스테리북스 시리즈는, 주로 추리나 스릴러, 하드 보일드 등 가벼운 페이퍼백들인데 하여튼 옛날 고리짝에 대부분 중역을 거쳐 나왔던 책들이 재판을 거쳐서 나온 버전(?)이다. 학창 시절에도 몇 권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책들을 고른 건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
 
그러니까, 대부분 이런 분위기의 작품들..
 
그러나 이내 곧 내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으니.. 바로 그 책들 대부분이 '중역본'이었다는 것. 이전에 러브크래프트에 대해 포스팅을 할 때 지적했던 건데, 이노무 중역본(대개 원서의 일본어 번역본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책들)은 그 표현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옛날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 맞춤법에도 어긋난 경우가 많이 때문에 보기가 몹시 피곤해진다.
 
이번에 구입한 책들 중 '피의 수확', '웃는 경관'이 중역본이었고, '난파선 메리디어호'는 완역본이었다. 앞의 두 권은 일단 역자가 모두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이어서 당연한 거고 뒤의 한 권은 역자가 영어 전공자였는데, 꼭 그런 사실을 모르더라도 책의 말투를 딱 보면 안다. 뭐가 중역본이고, 완역본인지.
 
피의 수확


고전 느와르/하드 보일드의 거장이자 '말타의 매' 원작자이기도 한 대쉴 해미트의 첫 장편이라고 해서 무척 기대를 많이 했는데 번역이 영 꽝이어서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피의 수확 지못미.
 
그렇긴 해도 예전 레이몬드 챈들러의 완역본 '빅 슬립'을 읽을 때처럼, 워낙 탄탄하게 구축된 캐릭터들이 정말 막장 인생들만 모인 막장 동네에서 벌이는 이야기가 손에 잡힐 듯 실감난다. 정말 카메라만 갖다 대면 그대로 이야기가 줄줄줄 흐르는(?)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졌던 할리우드 초창기의 제작자들은 참 행복했을 것 같기도.
 
 
웃는 경관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스웨덴의 부부 작가가 집필했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밤, 시내 외곽 지역에서 2층 버스가 발견된다. 그 버스 안에는 시체 9구가 들어있었고.. 이 작품은 이렇게 어려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경찰'들'이 주인공이란 점이 독특하다. 이야기 안에는 여러 영화나 소설 등을 통해 익숙해진 경찰의 수사 방식이 등장한다. 미행, 잠복, 추적, 그리고 끝이 없는 탐문, 탐문, 탐문. 참 피곤한 일상을 사는 경찰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중역본 답지 않게 비교적 깔끔한 번역도 돋보인다.
 
 
난파선 메리디어호


오랜만에 참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표지에는 해양 어드벤처 뭐시기라는 말이 있긴 한데 그런 거창한 미사여구보다는 그냥 담백한 스릴러, 혹은 법정 드라마라고 해도 괜찮을 것. 폭풍우가 몰아치는 영국의 해안에서 주인공이 한 난파선을 만난다. 엄청나게 넓은 화물선 안에서 결국 발견한 사람은 딱 한 명. 그러나 메리디어호의 선장인 이 사람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결국 해양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긴 하지만 이 화물선의 난파에 관해 열린 법정에서조차 선장은 별 언급이 없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딱 하나. 암초에 좌초되고 아직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메리디어호에 다시 가야 한다. 결말이 좀 상투적이긴 하지만 결말 바로 직전까진 꽤 긴박감 넘치는 괜찮은 작품이었다.
 
한 권 가격이 요즘 나오는 신간의 1/3 정도 가격이면 훌륭한 선택인 게 맞지만, 중역본은 가급적 피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