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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s

낮술: 알콜 판타지 로드무비의 재미



1. 오늘 저녁의 술약속은 뭐부터 달릴까

어제 마신 술로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린다. 오랜만에 만나는 녀석이다. 이전에 같은 동호회에서 활동을 하던 친구인데, 동호회 회원 대부분이 아직 미혼이었을 무렵에는 거의 보름에 한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만나며 참 게걸스럽게도 술잔을 비워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다들 가정을 갖고, 또 사는 곳도 멀어지다 보니 만남의 주기가 한 달, 3개월, 6개월 정도로 멀어졌다. 그런 친구들 중 하나가 오늘 저녁 다 같이 만나자고 하는 것이다.

오늘 저녁은 뭐부터 달릴까.

2. 지르자, 질러 버리자, 낮술로 소주를

노영석 감독의 독립영화 '낮술'을 보고 있자니, 말 그대로 대낮부터 식당용 물컵에 넘치도록 따른 소주를 들이킨 듯한 기분이다. 사실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어지간하면 낮술은 꺼리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오후 스케줄에 지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가끔 '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게 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찌질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는 게 낮술이라고 한다면 거의 틀리진 않을 것.

그리고 실제로 낮술을, 그것도 '쐬주'로 벌컥벌컥 들이마시면 십중팔구는 평소 주량보다 적게 마셔도 금방 취한다. 호기가 지나쳐서 오기를 부르는 게 바로 낮술이다. 전체 제작비는 단돈 1천만 원. 키네코 작업을 거친 화면은 꼭 낮술에 취한 것마냥 핀트가 안 맞기도 하고 사운드는 거칠다. 노영석 감독은 혹시 낮술에 취해 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건 아닐까?!



3. 짜릿한 청량감의 생맥주 한 잔

영화 속 배경은 겨울이지만, 찌는 듯한 무더위의 복날을 생각해 보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드는 호프에서 들이켜는 생맥주 한 잔의 짜릿함은 무엇과도 바꾸기가 힘들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저 뻔한 영화들, 예컨대 어거지 설정의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나 화끈함이 지나친 근육질 액션, 혹은 멜로의 탈을 쓴 신파조 사랑 놀음이나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를 골아픈 예술 영화 등등이 요즘 극장에 걸리는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분명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기술적으로는 결함이 많은 작품이 바로 '낮술'이다. 하지만 그 모든 단점을 덮어버릴 장점이 이 영화엔 있다.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말 소소하고 재미있으며 웃기는 요소들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공기(과장해서 말하자면, '취기')가 된다.

4. 동네 구멍가게에서 산 양주로 찌질함은 극대화

양주, 그 중에서도 위스키는 모름지기 끈적끈적한 재즈가 흐르는 바에서, 빠텐 의자에 걸터앉아 마시는 게 제맛. '낮술'에는 정말 관객의 속이 쓰릴 정도로 술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영화 자체가 저렴하다 보니 등장하는 종목(?)은 태반이 소주, 기껏해야 PT병 맥주. 근데 이 영화에도 양주가 나오긴 나온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파는, 모르긴 몰라도 기타제재주일 것이다. 살짝 안면을 튼 아가씨를 '뻔하지만 어떻게든 해보려고' 산 이 싸구려 양주는 오히려 주인공의 찌질함을 극대화하는 특별한 소품이다. 사실 그 전에 나름 괜찮아 보이는 와인도, 이 주인공의 찌질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신체 건강한 젊은 남자의 욕망, 굳이 부연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남녀 사이에서)오고가는 술잔 속에 (남자 혼자만의 생각으로는)불꽃이 튀고, 모종의 썸씽스페셜이 일어나면 (남자의 입장에서는)이보다 더 해피할 수 없는 엔딩이 된다. 하지만 인생사가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이뤄지지는 않으며 보는 관객은 키득거린다. 이게 바로 코미디의 맛이다.



5. 그리고, 해장은 콩나물국밥

그리고, 이제는 해장을 할 차례. 개인 취향에 따른 차이가 크지만 거의 대부분의 술꾼들이라면 전날의 술이 덜 깬 푸석푸석한 속을 알싸한 콩나물국밥으로 달래는 선택이라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름지기 대안이라 할 것 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낮술'은 기본적으로는 매우 웃기는 코미디이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뻔한 남성의 뻔한 환상을 드러내놓고 자극하는 판타지물이다. 외견상 로드무비 장르로 구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손바닥 만한 정선이라는 동네에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끝난다.

이렇게 다양한 부분에 꿈틀거리는 촉수를 딱 알맞게 뻗친 '낮술'이 유쾌한 영화인 것은, 작은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재미를 정확히 꿰고 있는 노영석 감독의 덕이다. 만약 그가 '낮술'을 연출하겠다고 마음 먹은 게 정말 술에서 덜 깬 상태에서의 선택이었다면, 나는 그가 콩나물국밥을 삼시 세끼 먹어도 영원히 술이 안 깨고 있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말은 그렇게 해도 너무 무리하고도 미안한 요구인 것 같다.

6. 추신: 서비스 안주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한국주류협회나 아니면 특정 주류 회사로부터 스폰을 유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보고 난 다음의 느낌은 생각보다는 술이 '땡기는' 영화는 아니다(이유를 자세히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극장전'의 홍상수 감독은 정말 탁월한 내공의 소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