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vies

비 카인드 리와인드와 용산



굉장히 인상 깊었던 이터널 선샤인의 감독 미셸 공드리의 연출작에 잭 블랙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믿기가 힘들었다(사실 이터널 선샤인 때 짐 캐리의 출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가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이 과연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 것인가 궁금했는데, 사실 잭 블랙의 영화 내에서의 비중은 그리 큰 편이 아니다.

도시 재개발의 바람을 타고 이제 헐리게 될 운명에 처한 비디오 대여점이 있다. 늙수구레한 주인 할아버지는 어떻게든 가게를 살려보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진 않는다. 그런데 정말 우연한 일로 '비 카인드 리와인드'라는 이 가게에 손님이 들끓게 된다.

그 비결은, 유명한 영화들을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직접 촬영을 해서 테이프에 담아 대여하는 것. 이 과정에서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데, 이를테면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그 유명한 조깅 장면을 촬영하면서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른다든지, 특수 자동차가 터널 천장을 거꾸로 통과하는 맨 인 블랙의 장면 촬영 등은 그 영화들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에게는 충분한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소문이 퍼지자 거대 영화사들이 저작권 위반 혐의로 비 카인드 리와인드를 고소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우리의 이웃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강제로 폐기되는 광경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다.

힘 없는 이웃들에게 남은 희망은 오직 하나.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마지막 영화를 만들어 이를 상영하여 번 수익으로 가게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하지만 결국 낡아 빠진, 볼품 없는, 비디오 대여점 비 카인드 리와인드는 강제 철거의 수난을 맞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이야기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엄존한다.

불과 얼마 전, 우리의 이웃들 몇 명이 목숨을 잃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터전이 된 곳으로부터 강제로 쫓겨나게 된 처지의 그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유쾌한 선택은, 어디까지나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헌법에도 명백히 보장된 최소한의 주거권마저 박탈 당한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지칭하는 작자들이 국정을 좌우하는 세상. 용산 참사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고? 이번 사건의 배후가 있다면 바로 그렇게 비도덕적이고 몰염치하고 기본적인 인권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도시 재개발 정책이고, 그런 정책을 몰아붙인 자들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에도, 아니 오히려 보고 난 다음에 더 가슴이 먹먹하고 절절하다. 엔딩 크레딧을 수놓았던 OST의 마지막 넘버를 올린다.

그날 신새벽에 유명을 달리 한 분들 모두의 명복을 빈다. 부디 저 세상에서는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