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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참 상큼한 풍자, 그랜드 펜윅 이야기

 

 

 

 

현실을 풍자하는 방법에는 대략 두 가지 정도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커트 보네거트처럼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방법. 덧붙이면 딱 '그 때 그 사람들' 까지의 임상수 감독도 이런 구분 안에 넣을 수 있을 듯(그 이후엔 조금...).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를 쓴 레너드 위벌리처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상큼한 기분을 맛볼 수 있게 하는 방법.

 

그랜드 펜윅 시리즈 가운데 첫 작품인 뉴욕 침공기는 한 5~6년 전에 읽었는데 그 때도 이 재미진 작품에 흠뻑 빠졌다. 그러고는 시리즈의 3번째 이야기인 월스트리트 공략기를 조금 전에 다 읽었다. 참고로 2번째와 4번째 시리즈가 각각 달 정복기와 석유 쟁탈기 등이라고 하는데 첫 이야기로부터 오히려 3번째 이야기인 월스트리트 공략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이 더 많다고.

 

면적과 인구 수에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며 와인과 양모를 수출해서 근근히 먹고 살아가는 유럽의 가상 소국 그랜드 펜윅. 이 나라가 참으로 야심차게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심지어 이겨버리는(?) 포복절도할 코미디가 뉴욕 침공기였고 그 이후의 이야기가 월스트리트 공략기에서 이어진다.

 

그랜드 펜윅은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걸로 유명한데, 미국의 한 제과 회사에게 와인 맛 껌(-_-;;)의 미국 내 생산과 판매에 대한 전권을 부여한다. 때마침 불어닥친 금연 열풍으로 이 껌이 날개 돋힌 듯 팔리면서 로열티로 100만 달러(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별 것도 아닌 액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1950년대엔 꽤 큰 액수였을 것이다)를 받게 된다. 그랜드 펜윅의 미니 의회에선 대략 1년치 국내 총생산에 해당하는 이 액수를 전국민에게 나눠준다;; 그러면서 발생하는 문제. 누구도 일을 하려 들지 않는 것!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와인 맛 껌이 더더 많이 팔려서 무려 1천만 달러를 벌게 되자, 그랜드 펜윅의 젊은 왕녀 글로리아나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 돈을 다 써버려야 하는, 무지하게 절박한(?) 상황에 처한다. 그녀가 생각한 방법은 타임스지의 경제면 중 주식 관련 페이지를 펼쳐놓고 눈 딱 감은 상태에서 아무 회사나 콕 찍어서 그 회사의 주식을 모조리 사는 것(그러면서 이 돈을 다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절묘하게 이 주식이 대박을 쳐서 무려 10억 달러(!)에 이르는 수익을 발생시키게 되는 것이다... 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뉴욕 침공기에 관한 이야기 한 가지 덧붙인다. 책을 읽고서, 그걸 영화화한 버전도 봤는데 나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털리 배스컴이 영화에선 영 못마땅하게 그려져서 사실 영화는 별로였다(다만 원작 소설에는 없는 과학자의 딸로 나온 진 세버그는 당연히 좋았다. 내가 아직까지도 머리가 짧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네 멋대로 해라'에 나온 진 세버그 때문일 거야...). 원작에선 굉장히 복합적인 캐릭터였고 심지어 미국과의 전쟁에서 실제로 미국을 이기려는 야심도 갖고 있는 젊은이였는데 영화에선 그저 흐리멍텅한 개그 캐릭터가 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월스트리트 공략기에서도 털리 배스컴이 나오기는 하는데 이미 글로리아나 왕녀와 결혼을 한 유부남이라서 그런지 별 활약이 없다;; 조금 아쉬운 부분. 다른 시리즈인 달 정복기(내용을 조금 찾아보니 여기선 미국이 쓰고 버린 우주선을 달에 쏘아올린다고)나 석유 쟁탈기에선 더 많이 나오려나?